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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먹던 기억은 왜 사라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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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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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먹던 기억은 왜 사라지는 것일까

뇌의 폭풍 성장이 기억상실의 원인
 

따스한 기운이 담긴 바람이 살랑거리는 어느 봄밤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포대기에 둘러업은 후 밖으로 삐져나온 내 머리 위에 망사로 된 흰 덧옷을 하나 덮었다. “혹시 추울지도 몰라”라고 중얼대면서…. 그런데 잘못 덮었는지 내 눈과 그 덧옷 사이에 조그만 공간이 생겨 어머니가 업고 가는 내내 나는 집들과 밤하늘의 경계에 해당하는 동네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선명한 한 편의 동영상처럼 저장된 내 생애 최초의 기억이다. 이때가 몇 살 때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잠들지 않은 아이를 굳이 업어서 다닐 정도면 아마 걸음걸이가 영 시원찮았을 때인 것 같다. 생애 최초의 기억치곤 꽤나 이른(?) 사례인 셈이다.

그러나 이 장면 외에 생각나는 어릴 적 기억은 대여섯 살 이후의 단편적인 일들뿐이다. 봄밤의 외출 이후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혹은 어머니가 나를 업고 다니던 또 다른 기억들은 일체 떠오르지 않는다. 나뿐만 아니라 대개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어린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도 네댓 살 이전의 일들은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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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적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켜 심리학계에서는 ‘아동기 기억상실’이라 한다. ⓒ Public Domain

이처럼 아주 어릴 적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켜 심리학계에서는 ‘아동기 기억상실’이라 한다. 그럼 어릴 적 기억은 언제부터 우리의 뇌에서 사라지는 것일까. 미국 에모리대학의 바우어 교수팀의 실험 결과에 의하면 그 시기는 대략 7-8세 때부터다.

연구진은 3세 때 어린이가 생일파티처럼 자신에게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나눈 대화를 녹음한 후 6년 동안 그 어린이들이 특정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매년 체크했다. 그 결과 5세 6개월 된 어린이는 3세 때 일을 80%, 7세 때는 60% 정도 기억했지만, 7세 6개월 때는 40% 이하로 기억했다.

즉, 아동기 기억상실은 우리가 너무 어려서 그 상황을 뇌에 저장하지 못한 게 아니라, 당시에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그 기억을 상실하는 현상이다. 물론 성인이 된 후에도 기억은 시간에 비례해 차츰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예 통째로 사라지는 아동기 기억상실은 성인기의 망각과는 분명히 다른 현상이다.

뇌세포의 새로운 연결로 유아 기억 사라져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성장 과정에서 떠올리기 불편한 기억을 억누르는 기제가 작동하면서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아들의 경우 기억 자체를 안정적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기억이 생성되기 위해선 자아 개념이나 언어 습득 같은 발달 과정이 필수인데, 유아기에서는 그 같은 발달 과정이 채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서 기억 자체를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3세 이하 유아들도 최소 한 달 내지 1년 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여러 실험으로 밝혀지면서 이 가설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어릴 때 뇌에서 폭풍 성장하는 신경세포가 아동기 기억상실의 원인이라는 이론이 가장 주목받고 있다. 인간의 뇌는 어릴 때 뇌세포와 뇌세포가 직접 연결돼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뇌가 성장하면 마치 다리와 길이 새로 놓이듯이 뉴런과 뉴런 사이에 새로운 연결이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해 뇌세포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어지게 된다. 이처럼 특정 기억을 담고 있던 기존의 회로가 끊어지고 새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유아기의 기억은 자연스레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 이 가설의 핵심이다.

수년 전, 토론토어린이병원의 신경과학자 부부인 프랭크랜드와 조슬린은 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쳇바퀴를 돌게 한 쥐들이 그렇지 않은 쥐들보다 오히려 특정 기억력 테스트에서 더 나쁜 성적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쳇바퀴를 도는 운동을 하면 새로운 신경조직이 만들어져 뉴런과 뉴런이 새롭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올해 초 프랭크랜드 부부는 이와 관련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쥐들의 새로 생긴 뇌세포 DNA에 녹색 형광물질 단백질을 바이러스 형태로 주입한 결과, 녹색 빛이 나는 새로운 세포가 기존의 뇌세포 연결 회로에 합류하는 것이 관찰된 것.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조건

녹색 빛의 새로운 세포가 기존 세포를 완전히 대체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경조직이 새로 생겨나도 기존의 기억을 간직한 뇌세포와 그 기억들이 아예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기억을 불러내기는 어렵다. 기억 자체가 완전히 다시 배열되면서 끊임없이 뒤죽박죽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프랭크랜드 박사는 꺼내기 어려운 기억이라면 사실상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즉, 유년기의 기억은 이처럼 통째로 우리 뇌가 꺼내어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그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생애 최초의 기억이 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한 걸까. 우리가 생각하기엔 아주 공포스럽거나 혹은 특별한 상황에서 겪은 일이 우선일 것 같다.

그러나 심리학자 캐롤 피터슨 박사의 실험에 의하면 어릴 적 기억 중 장기기억으로 저장되는 것은 가족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면서 기억의 강화로 이어지는 경우인 것으로 나타났다.

피터슨 박사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직접 확인한 생애 최초의 기억 역시 특별한 상황보다는 의외로 평범한 것들이 많았다. 즉, 특별한 일보다는 일상에서 흔히 겪을 수 있고, 자주 되새김질한 기억이 생애 최초의 기억이 될 확률이 높은 셈이다.

기억은 자신을 자신이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 하지만 기억은 자칫 변형되거나 사라지기 일쑤다. 만약 자신이 지닌 생애 최초의 기억이 남들보다 훨씬 이른 시기라면 그건 자신의 좋은 기억력이 아니라 그때의 상황을 강화시켜준 가족 덕분일지도 모른다.


이성규 객원기자다른 기사 보기yess01@hanmail.net
저작권자 2018.03.26 ⓒ ScienceTimes